캐나다 이민/소소한 캐나다 일상

끈기가 생명이다(Never ever give up!) -- 내가 캐나다 수의사가 된 과정

퀀텀점프2025 2023. 7. 7. 10:24

출처 Luca J @ unplash.com

지난 포스트에서 수의사가 되는 과정을 얘기했었다. 이제는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한다.

내가 미국 수의사가 되고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먼 과거 20년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나는 수의대를 졸업하고 짧게 이런 저런 경험을 하다가 수의공무원이 되었다. 2000년 가을의 일이었다. (우와~세월이 이렇게나 지났나?) 일의 특성상 조직의 대부분이 수의사였기에 막내로 시작해서 나름 재미있고 잘 사회생활을 해나갔다.

하지만 항상 마음속에는 '이렇게 평생을 살아도 되는건가? 후회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공무원이라는 특성상 굉장히 안정되어있고 변화가 없는 생활을 평생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갑갑했었다. 그렇게 몇년이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당시 우리 조직의 우두머리이신 소장님의 한마디가 나를 조금씩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00 선생, 공무원을 하더라고 영어공부는 하는 게 좋아. 영어를 하면 여러가지 좋은 기회가 생기거든." 대충 이런 말씀이셨던것 같다.

대학교때 공부를 참 안하고, 술마시고 놀기 좋아하던 나였지만, 영어공부를 그것도 독해가 아닌 듣고 말하기를 하고 싶었던 나는, 그당시 영어회화의 베스트셀러를 읽고 아 나도 해야지~라고 생각만 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 언제나 해야지 생각만 한 것이었다.

그 분의 말씀은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영어공부에 불을 붙였고, 막연히 알고 동경했던 미국 수의사에 대한 생각에 불을 지펴주었다. 그 당시 나에게 귀감을 주었던 책은 '이재룡 할아버지 297시간만에 귀를 뚫다'였다. 영어로 된 책을 들릴때까지 듣고 책을 읽어서 영어를 이해한다는 내용의 책이었다. 나에게는 너무 와닿았고, 그분이 실천하신 방법으로 나도 실행했다. 펭귄리더스 책과 테이프 (그당시에 MP3가 유행이었는데, 책에는 테이프가 묶여있었다.)를 레벨 1부터 구입해서 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잠만 오더니 진짜 무식하게 듣기 시작해서 테이프가 늘어날 지경이 되자, 어느날 거짓말처럼 그 내용이 들리고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책을 한권 두권 섭렵하기 시작했다.

듣기에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자 말하기 연습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건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다. 테이프로 닳도록 들은 내용이었건만 내 입에서 나오는 발음은 내가 들어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소리였다.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들었던 발음을 내가 소리내어 말할 수 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충격이란.

이때부터 말하기 듣기를 늘이기 위해 방법을 찾다가 '박코치의 소리영어'를 접했다. 지금은 흔하디 흔한 쉐도잉 방법이었다. 짧은 뉴스를 반복해서 따라하고, 프렌즈 드라마를 쉐도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어스터디 모임을 만들어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서 서로 같이 연습했다. 지금은 그분들의 모습도 잘 생각이 안나지만, 각기 다른 분야에 계시는 분들과 영어를 연습하던 그때가 참 재미있었던 것은 생생히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의 영어실력을 점차 늘여갔다.

이야기가 어째 영어공부로 샌것 갔다. 여튼, 영어공부를 하게되고 영어에 조금씩 자신감이 붙으면서 나는 좀 더 구체척으로 미국 수의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외환 계좌를 만들어 적금을 붙기 시작했고, 미국 수의사를 준비하는 스터디 모임에 가입했다.

이 스터디 모임이 서울에 있었기에 지방에 살던 나는 KTX를 타고 주말마다 서울을 가서 모임에 참석했다. IELTS 영어 시험도 쳐야했기에, 토요일에는 서울에 있는 영어학원에 참석하고, 토요일 밤부터는 스터디 모임에 참가하는 식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젊고, 미혼이었기때문에 가능했던것 같다.

미국 수의사협회에 등록하고, 수의사 자격증 모임을 1년정도 하던 도중에 나는 결혼을 하게되었고, 결혼후 임신과 육아로 스터디 모임은 그만두게 되었다. 육아휴직중에 영어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육아는 시어머니께 맡겨두고 나름 공부를 했지만, 항상 스피킹 7점의 벽을 통과하지 못해서 애를 먹었다. 스피킹이 6.5점을 넘지 못하는 것이었다. 영어튜터와 레슨도 받고 시험에 비용을 많이 쏟아부었다. 그러다가 아 이번이 마지막이다하고 생각하며 편한하게 본 마지막 시험에서 드디어 스피킹 7점을 받게 되었다. 이 과정도 2년정도 걸린 것 같다. 드디어 1단계 통과를 한 것이었다.

결혼을 하고 임신 중이었을 때 캐나다 이민도 신청해 놓은 상태였다. 이때 미국이 아닌 캐나다로 가서 수의사를 하겠다고 경로를 바꾸게 되었다. 그당시 가족이 있는 상태에서 미국에 합법적으로 머물기가 상당히 어려웠지만, 캐나다 이민은 진입장벽이 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이 항상 예정되로 진행되지는 않는 법. 내가 마음을 바꾸어, 10년차 공무원을 그만두고, 영어학원에서 강사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캐나다 이민도 포기하고 둘째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국제적인 인재로 거듭나는데 기여하고 싶다는, 너무도 이상적이었던 나의 목표는 현실적인 학교 영어성적 향상에 가로 막혔버렸다. 영어강사 생활 5년만에 다시 캐나다 수의사의 꿈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래서 2단계 시험인 BCSE 를 준비하기 시작했지만, 보기 좋게 떨어졌다. 영어로 된 전공시험을 보기만해도 머리가 아파오고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포기했던 캐나다 이민을 위해 유학후 이민이라는 경로를 선택하고, 캐나다 컬리지에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영어도 늘이고, 오랫동안 손 놓은 전공관련 분야라 vet technician program (수의간호학과)에 지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수의간호학과는 캐나다/미국에서도 인기 학과라 국제학생을 잘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벤쿠버가 있는 BC주는 아예 영주권자 이상이 되어야 지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오타와에 있는 학교가 국제학생도 받아준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입학 시험을 학교에서 쳐야하고 1년후에 지원이 가능하다하여 영어공부 겸 입학이 쉬운 다른학과에 지원하여 우선 캐나다에 오게 되었다. 이때가 2014년이었다.

1년의 다른 학과 과정을 마치고 수의간호학과 입학시험을 치르고 10:1의 경쟁을 뚫고 들어가니 인터내셔널 학생은 오로지 나혼자, 동양인도 오로지 나 혼자였다. 선생님과 학생들의 빠른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었고, 빡세게 진행되는 수업을 따라가기도 쉽지 않았다. 입학을 60명이 했는데, 졸업은 30명 정도 했으니, 캐나다 학생들에게도 쉽지는 않은 과정이었다. 백그라운드로 깔려있는 전공지식과 부대끼며 늘어가는 영어로 졸업을 했다. 중간에 BCSE 시험을 한 번더 응시했는데 또 떨어졌다. ㅋㅋ

졸업하고 이민자격을 얻기위해 지겨운 IELTS 시험을 또 보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라이팅 7점이라는 점수가 나의 발목을 잡았다. 아무리해도 6.5점을 넘기지 못하는 것이었다. 라이팅이 7점이 되어야, 이민 신청시 나이가 많아서 깍인 나의 점수를 보충할 수 있었기때문이다. 몇달을 영어시험에만 매달리다가 이렇게는 안될 것 같아서 이력서을 돌리기 시작했고, 지금 일하고 있는 병원에 수의간호사로 취직하게 되었다.

학교 영어와 직작영어는 전혀 다른 레벨이었다. 병원에 오는 손님을 상대하고, 전화에 응대하고, 치료에 대해 설명하고, 수의사를 보조하는 모든 일들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영어로 하루종일 말하는 것, 그리고 이해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역시나 여기도 나혼자 외국인 노동자, 나혼자 동양인이었다. ㅋㅋㅋ 영어가 버거우니 당연히 표가 났고, 일하는 초반에 보스가 나보고는 전화를 안 받아도 된다고 까지 이야기했다. 이때 엄청난 충격이었다. 집에 와서 얼마나 이불킥을 날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영어는 늘어갔고 - 안 느는게 이상한 거다- 전화도 무리없이 받을 수 있었지만, 무시하고 안 받았다. 일종의 소심한 복수?라고 할까? 전화받는 게 은근 스트레스가 커서 다들 그닥 좋아하지는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각종 케이스를 보고, 공부를 하니 BCSE 세번째 시험에서 드디어 붙었다!! 정말 기뻤다.

그리고 속도를 붙여 NAVLE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일하면서 공부하느라고 힘들었다. 그러던 도중 코비스 사태가 시작되었고, 재택근무가 늘면서 동물병원 진료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그동안 바쁜 생활로 잊고 있었던 반려동물 키우기에 사람들이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동물구조 센터에 있는 강아지와 고양이들이 다 새로운 집을 찾아가고(만세이~), 브리더에게서 강아지나 고양이를 입야하려면 몇년동안 기다려야하는 사태가 생겼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병원진료자체가 축주의 접촉없이 이루어져야 했기때문에 병원의 전화는 불이 나고 해야할 일의 절차가 늘어나서 일하는 스트레스가 엄청 늘어났다.

그와중에 나는 유방암이라는 진단을 받게되었다.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모든것이 한순간에 기우는 것 같았다. 우선 병원에 1년 휴직을 내고, 수술을 받고 몸을 회복하는 데 집중했다. 12월에 예정되었던 시험은 5월로 연기했고, 몸이 조금씩 회복되는 시기에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어쩌면 더 이상은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내 목표를 화이트 보드에 커다랗게 써서 책상앞에 붙여두고,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앉아서 공부했다. 그리고 5월 시험에서 단번에 합격했다. 아! 그때의 기쁨이란....!

시험이후 여름 7월, 8월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신나게 놀고, 9월에는 임시면허를 받고 수의사로 병원에서 다시 일하게 되었다. 참 운이 좋게도 내가 일하는 병원에서 내가 수의사가 되는 과정동안 정말 지원을 잘해줬다. 수의사로 돌아가서 수퍼바이져를 쉐도잉하고 천천히 진료를 보기 시작하고, 수술도 하게되었다. 5개월뒤에는 풀타임으로 진료를 보기 시작했다. 캐나다에서 CPE 임상시험을 보려면 PSA라는 pre-test를 봐야하는데 이 시험비만 천불이 넘고, 대기자 명단이 길어 오래 기다려야했다. 나는 오래전에 미국협회에도 등록을 했었기에, 임상시험은 미국으로 일정을 잡았다. 이러면 PSA를 안 봐도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험 자리도 캐나다보다 많고, 시험 스케쥴이 열리면 빨리 예약하는 사람이 임자라서 대기시간이 짧았다.

작년 7월에 라스베거스에 가서 임상시험을 3일에 걸쳐 보았다. 시험보기 전에 5월에 CPE bootcamp라고 하는 Dr.T가 운영하는 5일짜리 트레이닝 코스를 했었는데, 임상시험 준비에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일종의 CPE 쪽집게 학원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느낌이었다.

임상시험은 정말 정말 멘탈컨트롤이 중요했다. 나는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자는 사람인데 진짜 라스베거스 도착해서부터 잠도 잘 못자고, 먹는 것도 힘들었다. 시험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다. 시험장 분위기도 한몫한다. 대동물 시험관들은 친절하고 분위기도 좋은데, 소동물 과목들은 좀 살벌하다. 특히 수술과 마취 시험 분위기는 긴장과 싸함이 끝내준다. 시작과 동시에 벽에 있는 큰 타이머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알려주고, 주변에 시험보는 사람들이 탈락하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속에서 사사껀껀 까다롭게 질문하는 시험관에게 대답하면서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을 시험규정에 맞게 해내가야 하는 것이다.

이 시험에서 나는 마취 한과목을 빼고 나머지는 다 통과했다. 마취시험이 오전이었고, 수술 시험이 오후였는데, 무너지는 멘탈을 부여잡고, 수술 시험 종료 5분전에 끝냈다. 내가 마지막 피부봉합을 하고 있을때 '컷팅니들 줄까?'라고 물어봐주고 건내준 수의간호사분 정말 감사하다. 덕분에 더 빨리 끝낼 수 있었다. 내가 시험치는 동안 까탈스럽게 이것저것 묻던 나이 지긋한 시험관이 정작 확인해야 할 부분을 안보고 스르륵 사라질때 수술실이 떠나가라 그 시험관을 불렸다. 다시 와서 내가 하는 것 확인하라고. 아니면 난 탈락하니까. ㅋㅋㅋ

탈락한 마지막 마취시험은 캐나다에서 등록을 했다. 재시험은 캐나다가 빨리 자리를 준다고해서. 그런데 캐나다 시스템은 내가 스케쥴 열리면 내가 예약하는 것이 아니고, 협회에서 이메일로 알려주는데 이게 시스템이 분명하지 않았다. 심지어 갑자기 3주후에 시험 자리가 있는데 할래? 말래? 이런식의 뜬금없는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우여곡절끝애 올해 4월말에 사스카툰에 가서 시험을 보고 모든 과정을 통과했다!!! 시험장 분위기는 역시 캐나다가 훨씬 좋았다. 수의과대햑에서 치뤄지는 시험이라서 이기도 했는데, 농담도 하면서 시험을 쳤다. 시험 기준은 다 똑같지만 분위기가 캐나다였다. 약간 느슨하면서 친절한 분위기.

비로서 임시면허를 떼고 정식 수의사면허를 따게 된것이다!! 내가 막연히 꿈꾸던 시절에서는 거의 20년만에, 캐나다에 오고나서는 8년만에 내가 원하던 꿈을 이루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내가 느낀 것은 진짜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인생의 굴곡을 넘어오며 힘든 시기에 진짜 이런 날이 올까 싶었던 날이 결국 온것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글을 읽고 있는 분이 있다면, 정말 정말 하고 싶은 말은 포기하지 않는다면 결국 된다는 것이다. 끝까지 될때까지 하면 된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어떤일을 시작하려는 분이나, 막연함에 포기하고 싶은 분에게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